만드는 사람의 "취향"
Taste for Makers by Paul Graham
“…코페르니쿠스가 [이퀀트]에 대해 품었던 미학적 반감은, 그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거부하게 된 본질적 동기 중 하나였다…” - 토머스 쿤, 『코페르니쿠스 혁명』
“우리 모두는 켈리 존슨에게 훈련받았고, 아름답게 생긴 비행기는 그만큼 아름답게 난다는 그의 신념을 광적으로 믿었다.” - 벤 리치, 『스컹크 웍스』
“아름다움이 첫 번째 시험이다. 추한 수학이 이 세상에 영원히 자리 잡을 곳은 없다.” - G. H. 하디, 『어느 수학자의 변명』
최근 MIT에서 가르치는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전공은 요즘 특히 인기가 많아서, 해마다 대학원에 지원하려는 학생들의 지원서가 쏟아진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똑똑해 보이는 학생은 많아요. 그런데 그들에게 ‘취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취향(Taste). 요즘은 이 단어를 자주 듣지 못한다. 하지만 뭐라고 부르든, 우리는 그 개념 자체는 여전히 필요로 한다. 내 친구가 말한 ‘취향’이란 단순히 기술이 뛰어난 학생이 아니라, 자신의 기술적 지식을 활용해 아름다운 것을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을 뜻했다.
수학자들은 훌륭한 작업을 두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지금이나 과거나, 과학자, 엔지니어, 음악가, 건축가, 디자이너, 작가, 화가들 역시 같은 표현을 써왔다. 이들이 같은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그들이 말한 ‘아름다움’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걸까? 만약 공통점이 있다면, 한 분야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의 기준을 다른 분야에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무언가를 설계하는 우리에게 이것은 단순한 이론적 질문이 아니다. 만약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취향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을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취급해 감정에 따라 장황하게 논하거나 아예 피해버릴 것이 아니라, 보다 실용적인 질문으로 접근해보자.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을 만들 수 있을까?
요즘 ‘취향’ 이야기를 꺼내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취향은 주관적인 거잖아요.”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왜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 그것이 아름다워서일 수도 있고, 어머니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잡지에서 영화배우가 쓰는 걸 봤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지 비싸다는 걸 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러 충동과 인상이 뒤엉켜 있지만, 그것을 하나하나 따져보지는 않는다.
우리 대부분은 어린 시절부터 이런 뒤엉킨 감정을 굳이 분석하지 않도록 배워왔다. 예를 들어, 동생이 색칠공부 책에서 사람 얼굴을 초록색으로 칠했다고 놀리면, 어머니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는 네 방식대로 하는 거고, 걔는 걔 방식대로 하는 거야.”
이때 어머니가 미학의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려는 건 아니다. 단지 둘이 그만 싸우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이 말해주는 이런 ‘반쯤 맞는 말’들은 종종 서로 모순된다. 취향은 개인적 선호의 문제일 뿐이라고 여러 해 동안 강조해 놓고는, 어느 날 미술관에 데려가서는 말한다.
“레오나르도는 위대한 예술가니까 잘 봐야 해.”
이 말을 들은 아이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스칠까?
‘위대한 예술가’라는 말은 무엇을 뜻한다고 받아들일까?
모두가 각자 자기 방식대로 하는 것뿐이라고 들어온 아이가, 곧바로 ‘위대한 예술가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작품을 만든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은 낮다. 오히려 그 아이의 세계관—일종의 프톨레마이오스적 우주관—안에서는, ‘위대한 예술가’란 누군가 책에서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좋은 것, 마치 브로콜리처럼 몸에는 좋지만 이유는 잘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더 크다.
취향이 그저 개인적 선호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분쟁을 피하는 데에는 좋은 방법이다. 문제는, 그것이 사실은 아니라는 점이다. 무언가를 직접 설계해보기 시작하면 그 사실을 체감하게 된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든 자연스럽게 더 잘하고 싶어 한다. 축구 선수는 경기에서 이기고 싶어 하고, CEO는 수익을 늘리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일을 더 잘하게 되는 것은 자부심의 문제이자, 실제로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약 당신의 일이 무언가를 설계하는 것이고,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더 잘할 방법도 없다. 취향이 단지 개인적 선호라면, 모두의 취향은 이미 완벽하다.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걸 좋아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계속 설계를 하다 보면 실력이 늘어난다. 그리고 취향도 변한다. 일을 더 잘하게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스스로도 자신이 나아지고 있다는 걸 안다. 그렇다면 예전의 취향은 단지 ‘달랐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더 나빴던 것’이다. 이 순간, ‘취향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공리는 사라진다.
요즘은 상대주의가 유행이라, 취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심지어 자신의 취향이 성장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최소한 스스로에게라도, 좋은 디자인과 나쁜 디자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때부터 좋은 디자인을 구체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내 취향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내가 실수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다른 사람들은 디자인에 대해 무엇을 배웠는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놀라운 점이 있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의 개념에는 공통점이 꽤 많다는 것이다. 좋은 디자인의 원칙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반복해서 등장한다.
좋은 디자인은 단순하다.
이 말은 수학에서 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반복된다. 수학에서는 더 짧은 증명이 대체로 더 좋은 증명이라는 뜻이다. 특히 공리의 경우에는 적을수록 좋다. 프로그래밍에서도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인다. 건축과 디자인에서는 아름다움이 피상적인 장식의 과잉이 아니라, 신중하게 선택된 몇 가지 구조적 요소에 기반해야 한다는 뜻이다. (장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빈약한 형태를 가리기 위한 위장일 때 문제가 된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몇 개의 대상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탄탄하게 묘사한 정물화는, 예컨대 레이스 칼라 같은 것을 화려하지만 무의미하게 반복해 그린 그림보다 더 흥미로울 가능성이 크다. 글쓰기에서도 의미는 같다.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그리고 간결하게 하라.
단순함을 굳이 강조해야 한다는 건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단순함이 기본이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화려함은 오히려 더 많은 수고를 요구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창의적이 되려는 순간’ 묘한 상태에 빠진다. 초보 작가는 평소 말투와 전혀 다른 거창한 문체를 쓰기 시작한다. 예술적으로 보이고 싶은 디자이너는 쓸데없는 곡선과 장식을 더한다. 화가는 어느새 표현주의자가 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회피다. 긴 단어나 ‘표현적인’ 붓질 아래에는 사실 별다른 내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는 일은 두렵다.
단순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면, 우리는 진짜 문제와 맞닥뜨린다. 장식으로는 더 이상 숨을 수 없다. 그때는 결국, 본질로 승부해야 한다.
좋은 디자인은 시대를 초월한다
수학에서는 실수가 없는 한 모든 증명이 시대를 초월한다. 그렇다면 하디가 “추한 수학은 이 세상에 영원히 설 자리가 없다” (“there is no permanent place for ugly mathematics”) 고 말했을 때, 그는 무엇을 뜻했을까? 그가 말한 바는 켈리 존슨과 같다. 어떤 것이 추하다면, 그것은 최선의 해법일 수 없다는 뜻이다. 더 나은 해법이 어딘가에 있으며, 결국 누군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의미다.
시대를 초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일은 스스로 최선의 답을 찾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만약 누군가가 언젠가 당신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상상된다면, 그 일을 남에게 맡기지 말고 스스로 해내야 한다는 뜻이다. 위대한 거장들 가운데는 이것을 너무도 잘 해낸 사람들이 있다. 그 결과, 뒤에 오는 이들이 설 자리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뒤러 이후의 모든 판화가는 그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야 했다.
또한 시대를 초월하려는 태도는 유행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방법이기도 하다. 유행은 정의상 시간에 따라 변한다. 만약 먼 미래에도 여전히 좋아 보일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의 매력은 유행보다는 본질적인 가치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흥미롭게도, 미래 세대에게 사랑받을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은 과거 세대에게도 사랑받을 만한 것을 만드는 것이다.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미래 역시 현재의 유행에는 별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이고, 동시에 1500년의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이었을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면, 2500년의 사람들에게도 통할 가능성이 크다.
좋은 디자인은 올바른 문제를 해결한다.
일반적인 가스레인지에는 네 개의 화구가 정사각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각각을 조절하는 다이얼이 있다. 그렇다면 다이얼은 어떻게 배치해야 할까? 가장 단순한 답은 일렬로 나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질문’에 대한 단순한 답이다. 다이얼은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다. 일렬로 두면, 사용자는 매번 어떤 다이얼이 어떤 화구에 해당하는지 잠시 멈춰 생각해야 한다. 차라리 화구와 같은 형태로, 다이얼도 정사각형으로 배치하는 편이 낫다
많은 나쁜 디자인은 부지런하지만,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 20세기 중반에는 산세리프체로 본문을 조판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런 글꼴은 문자 형태의 기본 구조에 더 가깝다. 하지만 본문 텍스트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가독성에서 더 중요한 것은 글자들이 서로 쉽게 구분되는가 하는 점이다. 다소 빅토리아 시대풍으로 보일지라도, 타임스 로만의 소문자 g는 소문자 y와 쉽게 구별된다.
문제는 해법뿐 아니라 문제 자체도 개선될 수 있다. 소프트웨어에서는 풀기 어려운 문제를, 본질은 같지만 훨씬 다루기 쉬운 다른 문제로 바꿀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물리학이 더 빠르게 발전한 것도, 자연 현상을 성경과 조화시키려는 데서 벗어나 관찰 가능한 현상을 예측하는 문제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좋은 디자인은 암시적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는 묘사가 거의 없다. 모든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주는 대신, 이야기를 하도 잘 들려줘서 독자가 저절로 장면을 떠올린다. 마찬가지로, 암시하는 그림은 대개 설명하는 그림보다 매력적이다. 모나리자를 보며 사람마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건축과 디자인에서 이 원칙은, 건물이나 사물이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좋은 건물은 건축가가 짠 프로그램을 실행하듯 살게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삶의 배경이 되어 준다.
소프트웨어에서는, 레고처럼 사용자가 마음대로 조합할 수 있는 기본 요소 몇 가지를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수학에서는, 많은 후속 연구의 토대가 되는 증명이 어렵기만 하고 미래의 발견으로 이어지지 않는 증명보다 낫다는 뜻이다. 과학 전반에서 인용 횟수는 가치를 가늠하는 대략적인 척도로 통한다.
좋은 디자인은 약간의 유머를 담고 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러의 판화, 사리넨의 웜 체어, 판테온, 그리고 초기형 포르쉐 911을 떠올려 보면, 어딘가 미묘하게 장난스러운 구석이 느껴진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조차 일종의 지적인 농담처럼 보인다.
아마 유머는 힘과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머 감각이 있다는 것은 강하다는 뜻이다. 불운을 겪어도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 강함이고, 유머를 잃는 것은 상처를 입었다는 신호다. 그래서 강한 사람의 특징, 혹은 특권은 자신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데 있다. 자신감 있는 사람들은 제비처럼 가볍게, 과정 전체를 살짝 비트는 태도를 보이곤 한다. 히치콕의 영화나 브뤼헐의 그림,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그렇다.
좋은 디자인이 반드시 유머러스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혀 유머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과연 좋은 디자인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좋은 디자인은 어렵다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엄청나게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열심히 하지 않고 있다면, 아마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어려운 문제는 큰 노력을 요구한다. 수학에서 어려운 증명은 기발한 해법을 요구하고, 그런 해법은 흥미로운 경향이 있다. 공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산에 올라야 한다면 배낭에서 쓸데없는 짐부터 다 빼야 한다. 마찬가지로 까다로운 대지에, 그것도 적은 예산으로 건물을 지어야 하는 건축가는 군더더기 없는 우아한 설계를 할 수밖에 없다. 그 단계까지 가면, 유행이나 장식은 애초에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는 더 큰 난관에 밀려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물론 모든 종류의 ‘어려움’이 좋은 것은 아니다. 좋은 고통과 나쁜 고통이 있다. 달리기를 하며 느끼는 고통은 좋지만, 못을 밟아서 생기는 고통은 그렇지 않다. 어려운 문제는 디자이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변덕스러운 고객이나 신뢰할 수 없는 재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술에서는 전통적으로 인물화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해 왔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단지 얼굴 그림이 우리의 뇌를 더 강하게 자극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얼굴을 보는 데 매우 능숙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리는 사람에게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나무를 그리면서 가지 각도를 5도 바꿔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눈 각도를 5도 바꾸면, 대부분은 바로 알아차린다.
바우하우스 디자이너들이 설리번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받아들였을 때, 그 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기능이 충분히 까다로우면, 형태는 자연스럽게 그 기능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실수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야생 동물이 아름다운 이유도 같다.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군더더기가 없다.
좋은 디자인은 쉬워 보인다
위대한 운동선수가 경기를 쉽게 해내는 것처럼, 뛰어난 디자이너도 작업을 쉽게 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은 착각이다. 자연스럽고 대화하듯 읽히는 좋은 글도 사실은 여덟 번째 고쳐쓰기 끝에 나온 결과일 뿐이다.
과학이나 공학에서도 위대한 발견 중 너무 단순해 보여서 “나도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들이 있다. 그때 발견자는 이렇게 되묻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지 않았나요?”
레오나르도의 인물 스케치 중에는 몇 개의 선만으로 완성된 작품들이 있다. 보고 있으면, 선 여덟 개나 열 개만 제대로 그으면 이렇게 아름다운 초상이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렇다. 다만 그 선이 정확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아주 조금만 어긋나도 전체가 무너진다.
선으로만 그리는 드로잉은 사실 가장 어려운 시각 매체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정확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수학으로 치면 일종의 ‘닫힌 해(Closed-form solution)’와 같다. 덜 숙련된 화가들은 같은 문제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조금씩 맞춰 가며 해결한다. 아이들이 열 살쯤에 그림을 포기하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어른처럼 그리고 싶어지면서 얼굴을 선으로 그려 보려다 좌절을 맛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분야에서 ‘쉬워 보이는 경지’는 반복 연습을 통해 얻어진다. 아마 연습이란, 예전에는 의식적으로 처리하던 일을 무의식이 대신하도록 훈련하는 과정일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몸 자체를 훈련하기도 한다. 숙련된 피아니스트는 뇌가 손에 신호를 보내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음을 연주할 수 있다. 화가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부터는 눈으로 들어온 시각 정보가 거의 자동으로 손으로 흘러나온다. 마치 리듬에 맞춰 무의식적으로 발을 두드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존에 들어갔다”고 말할 때, 아마 이런 상태를 뜻하는 것일지 모른다. 척수가 상황을 장악한 상태다. 척수는 덜 망설이고, 그 덕분에 의식은 더 어려운 문제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좋은 디자인은 대칭을 활용한다
어쩌면 대칭은 단순함을 얻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체로 따로 언급할 만큼 중요하다. 자연이 대칭을 자주 사용한다는 사실도 좋은 신호다.
대칭에는 두 가지가 있다. 반복과 재귀다. 재귀란 부분 안에 같은 구조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나뭇잎의 잎맥처럼, 작은 요소 속에 전체와 닮은 패턴이 되풀이되는 경우다.
오늘날 일부 분야에서는 대칭이 유행이 아니다. 과거의 과도한 사용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다. 건축에서는 빅토리아 시대에 의도적으로 비대칭 건물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모더니즘 건축이 비대칭을 하나의 원칙처럼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비대칭인 것은 아니었다. 큰 축에서는 비대칭일지 몰라도, 세부에는 수많은 작은 대칭이 숨어 있었다.
글쓰기에서도 대칭은 문장 속 어구 배열에서부터 소설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에서 나타난다. 음악과 미술도 마찬가지다. 모자이크 작품이나 세잔의 일부 그림은 동일한 요소를 반복해 화면 전체를 구성함으로써 시각적 힘을 얻는다. 구성상의 대칭은 특히 두 부분이 서로 긴장하거나 반응할 때 강한 인상을 남긴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나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이 그렇다.
수학과 공학에서는 특히 재귀가 강력한 도구다. 귀납법을 활용한 증명은 놀라울 만큼 간결하다. 소프트웨어에서도 재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대개 그 방식이 가장 깔끔하다. 에펠탑이 인상적으로 보이는 이유 중 하나도 재귀적 구조 때문이다. 탑 위에 또 하나의 탑이 얹힌 형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칭, 특히 반복에는 위험도 있다. 생각을 대신하는 장치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디자인은 자연을 닮는다
자연을 닮는 것이 본질적으로 선해서라기보다는, 자연이 그 문제를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다듬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해법이 자연의 해법과 비슷해 보인다면, 그것은 대개 좋은 신호다.
모방이 곧 부정행위는 아니다. 이야기가 삶을 닮아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회화에서도 실제를 관찰하며 작업하는 것은 중요한 방법이다. 다만 그 의미는 종종 오해되어 왔다. 단순히 눈앞의 대상을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실제를 보고 그린다는 것은,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동안 손이 더 흥미로운 작업을 하도록 마음에 먹이를 주는 일이다.
자연을 모방하는 방식은 공학에서도 통한다. 배가 동물의 갈비뼈처럼 척추와 늑골 구조를 갖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물론 기술이 충분하지 않았던 경우도 있다. 초기 항공기 설계자들이 새처럼 생긴 비행기를 만들려 한 것은 잘못이었다. 당시에는 재료도, 동력원도 충분히 가볍지 않았고, 제어 장치도 새처럼 나는 기계를 다룰 만큼 정교하지 않았다. 라이트 형제의 엔진은 무게가 152파운드에 불과했지만 출력은 12마력뿐이었다. 그러나 50년쯤 뒤에는 작은 무인 정찰기가 새처럼 나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제는 컴퓨터 성능이 충분히 확보되었기 때문에, 자연의 결과뿐 아니라 자연의 방식까지 모방할 수 있다. 유전 알고리즘은 전통적인 의미의 설계를 넘어, 인간이 직접 구상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것들을 만들어내게 해줄지도 모른다.
좋은 디자인은 다시 디자인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제대로 되는 일은 드물다. 숙련된 사람들은 초기에 만든 작업 중 일부는 버릴 것이라고 예상한다. 계획이 바뀔 것을 전제로 계획을 세운다.
작업을 버리려면 자신감이 필요하다. “이건 다시 만들 수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림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잘못된 부분을 고쳐 그리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여기까지 온 것도 운이 좋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다시 손대면 더 나빠질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림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어쩌면 원래 그렇게 그리려던 것이라고 합리화하기도 한다.
위험한 지점이다. 오히려 불만족을 키워야 한다.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을 보면 한 줄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다섯 번, 여섯 번씩 시도한 흔적이 남아 있다. 포르쉐 911의 상징적인 후면 디자인도 어색한 초기 프로토타입을 다시 설계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구겐하임 미술관 초기 설계안을 그렸을 때, 오른쪽 절반은 지구라트 형태였다. 그것을 뒤집으면서 지금의 형태가 나왔다.
실수는 자연스럽다. 그것을 재앙처럼 대하기보다, 인정하기 쉽고 고치기 쉽게 만드는 편이 낫다. 레오나르도는 탐색을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 스케치를 사실상 발명하다시피 했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가 버그가 적은 이유도, 버그의 존재 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쉽게 만드는 매체를 사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15세기에 템페라 대신 유화가 쓰이기 시작하면서 화가들은 인체처럼 다루기 어려운 대상을 더 잘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유화는 템페라와 달리 색을 섞고 덧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디자인은 모방 할 수 있다
모방을 대하는 태도는 성장 과정에서 크게 달라진다. 처음에는 자신도 모르게 남을 따라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더 성숙해지면, 독창성보다 중요한 것은 ‘옳은 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의식적인 모방은 거의 나쁜 디자인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모른다면, 십중팔구 누군가를 따라 한 사람을 또 따라 하고 있는 셈이다. 19세기 중반에는 라파엘로의 영향이 워낙 강해서, 그림을 그리려는 사람 대부분이 여러 단계를 거쳐 그를 흉내 내고 있었다.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가 문제 삼았던 것도 라파엘로의 작품 그 자체라기보다, 그렇게 반복된 모방의 관습이었다.
야심 있는 사람은 단순한 모방에 만족하지 않는다. 취향이 성장하는 두 번째 단계는 의식적으로 독창성을 추구하는 시기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거장들은 그 단계를 넘어선다. 그들은 그저 가장 정확한 답을 찾고 싶어 한다. 만약 그 답의 일부가 이미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었다면, 그것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자신의 시각이 흔들릴까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충분히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서든 배우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가져온다.
좋은 디자인은 종종 낯설다
정말 뛰어난 작업들 가운데에는 묘하게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들이 있다. 오일러의 공식,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 SR-71 정찰기, 그리고 Lisp 같은 것들이다. 그것들은 단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어딘가 이상하리만치 아름답다.
왜 그런지는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내 이해력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 개에게는 깡통 따개가 기적처럼 보일 것이다. 만약 내가 충분히 똑똑하다면, e를 iπ만큼 거듭제곱하면 -1이 된다는 사실도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결국 그것은 필연적으로 참이니까.
지금까지 말한 여러 특성은 노력으로 기를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낯섦’을 일부러 기르려는 시도는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이 나타나려 할 때 억누르지 않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낯설게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참이 되게 하려 했고, 그 결과 진실이 낯설게 드러났을 뿐이다.
내가 한때 다녔던 미술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스타일을 갖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저 좋은 작업을 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결국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하게 된다. 사람마다 걷는 모습이 조금씩 다른 것처럼 말이다. 미켈란젤로는 미켈란젤로처럼 그리려고 애쓴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잘 그리려 했을 뿐이고, 그 결과 미켈란젤로처럼 그릴 수밖에 없었다.
가질 만한 스타일은 하나뿐이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스타일이다. 낯섦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다. 매너리스트와 낭만주의자들, 그리고 여러 세대의 미국 고등학생들이 찾아 헤맨 북서항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곳에 가는 유일한 방법은, 먼저 좋은 것을 통과해 그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다.
좋은 디자인은 덩어리째 나타난다
15세기 피렌체에는 브루넬레스키, 기베르티, 도나텔로, 마사초, 필리포 리피, 프라 안젤리코, 베로키오,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가 있었다. 당시 밀라노는 피렌체만큼 큰 도시였다. 그런데 15세기 밀라노 출신 예술가를 몇 명이나 떠올릴 수 있을까?
15세기 피렌체에서는 무언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유전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그곳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타고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면, 밀라노에도 그에 못지않은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 태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밀라노의 레오나르도는 어디로 갔을까?
오늘날 미국의 인구는 15세기 피렌체 인구의 대략 천 배쯤 된다. 이론대로라면 우리 주변에는 천 명의 레오나르도와 천 명의 미켈란젤로가 돌아다니고 있어야 한다. 만약 DNA가 전부라면, 우리는 매일 예술적 기적을 마주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레오나르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능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1450년의 피렌체가 함께 필요하다.
서로 비슷한 문제를 두고 씨름하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 한데 모인 공동체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그에 비하면 유전적 조건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밀라노 근처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유전적으로 레오나르도였을지라도 이를 상쇄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의 이동은 훨씬 자유로워졌지만, 여전히 위대한 작업은 몇몇 ‘핫스팟’에서 집중적으로 나온다. 바우하우스, 맨해튼 프로젝트, 뉴요커, 록히드의 스컹크 웍스, 제록스 PARC 같은 곳들이다.
어떤 시기든 주목받는 주제와 그것을 깊이 파고드는 소수의 집단이 존재한다. 이런 중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스스로 뛰어난 작업을 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 흐름을 밀거나 당길 수는 있어도,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밀라노의 레오나르도에게는 불가능했다.
좋은 디자인은 종종 대담하다
역사 속 모든 시대에는 터무니없는 믿음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도 굳게 믿어서 반대 의견을 내면 따돌림을 당하거나 심지어 폭력을 감수해야 했다.
우리 시대만 예외라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렇지 않다.
이 문제는 특정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느 분야에서든 어느 정도는 존재한다. 르네상스 미술도 당시에는 지나치게 세속적이라며 충격적으로 여겨졌다. 바사리에 따르면 보티첼리는 회개하고 그림을 그만두었고, 프라 바르톨로메오와 로렌초 디 크레디는 자신의 작품 일부를 불태웠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역시 많은 동시대 물리학자들의 반감을 샀고, 완전히 받아들여지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프랑스에서는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널리 수용되었다.
오늘날의 ‘실험 오류’는 내일의 새로운 이론이 되기도 한다. 위대한 발견을 하고 싶다면, 기존 통념과 진실이 어긋나는 지점을 외면하지 말고 오히려 주목해야 한다.
실용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우리는 아름다움을 상상하는 것보다 추함을 알아보는 일이 더 쉽다.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낸 사람들 대부분은, 무엇인가를 보고 “이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느낀 데서 출발했다. 위대한 작업은 대개 누군가가 “이건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시작된다. 조토는 수세기 동안 아무 문제없이 받아들여지던 비잔틴식 성모상이 자신에게는 딱딱하고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코페르니쿠스 역시 동시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던 한 가지 임시방편에 큰 불만을 품었고, 더 나은 해법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추함을 견디지 못하는 성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엇을 고쳐야 할지 정확히 알아보려면 그 분야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기본기를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숙련되면, 마음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건 임시방편 아닌가? 더 나은 방법이 있을 텐데.” 그 목소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키워야 한다.
위대한 작업의 공식은: 아주 엄격한 취향, 그리고 그 취향을 실제로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