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릴 때부터 문제를 ‘풀어내는 법’을 배운다. 시험에 나올 가능성이 높은 문제를 외우고, 답안의 형식에 맞춰 쓰고, 평가자 입장에서 좋아할 만한 말투를 흉내 낸다.
회사에 들어가면 그 훈련은 더 정교해진다. 일의 실질적인 성과가 아니라, 성과처럼 보이게 만든다. 수치를 부풀리고, 결과를 요령 있게 포장하고, 내부 관점이 아니라 외부 시선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폴 그레이엄은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시험에 맞춰 살아온 결과’가 이런 현상을 낳았다고 말한다.
시험은 원래 어떤 개념이나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우리는 시험을 ‘통과해야 할 관문’으로 받아들이며 그 본래 목적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걸 놓친다. 시험을 잘 치르는 법은 배우지만, 문제를 실제로 이해하거나 스스로 정의하는 능력은 훈련받지 못한다.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 “어떻게 하면 투자를 받을 수 있나요?“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들에게 투자 유치는 또 하나의 시험이고, 문제를 잘 풀면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세상의 중요한 문제들은 그런 식으로 ‘공략’할 수 없다. 투자받는 스타트업을 만들고 싶다면, 좋은 제품을 만들면 된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데조차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건 그들이 게으르거나 무능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열심히, 너무 오랫동안 ‘시험에 최적화된 사람’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구조가 단순히 교육 시스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직장과 인생 전반을 ‘시험처럼 공략하려는’ 습관에 갇혀 있다.
과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진짜 의미 있는 일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답안 작성인지조차 모를 때가 많다.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는 많은 방식들—보고서 쓰는 법, 회의에서 말하는 방식, 목표를 정하는 기준—그 모든 것이 사실은 ‘시험을 통과하는 법’에서 파생된 것일지도 모른다.
(원문) The Lesson to Unlearn by Paul Graham
학교에서 배우는 것 중 가장 해로운 것은 특정 과목이 아니다. 바로 좋은 학점을 받는 방법 그 자체이다.
대학 시절 어느 날 한 철학과 대학원생이 나에게 말했다. 그는 수업에서 어떤 성적을 받느냐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무엇을 배우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 말은 내게 강하게 남았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그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부분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배운 것’보다 ‘성적’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물론 나는 꽤 성실한 학생이었다. 수강한 수업에도 대부분 흥미를 느꼈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도 가장 열심히 공부한 때는 시험을 앞두었을 때였다.
이론적으로 시험은 말 그대로 ‘배운 것을 측정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이론상으로는 혈액검사를 준비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시험을 위해 별도로 공부할 필요도 없다. 수업을 듣고, 책을 읽고, 과제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습하면 되고, 시험은 그 결과를 확인하는 장치일 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아는 것처럼, 수업과 시험은 원래 의미와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현실에서 “시험을 위해 공부한다”는 말은 “공부한다”와 거의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시험을 위해서만 공부하기 때문이다. 성실한 학생과 게으른 학생의 차이는 성실한 학생은 시험을 앞두고 열심히 공부하는 반면, 게으른 학생은 그마저도 안 한다는 것이다.
나도 성실한 학생이었지만, 학교에서 했던 거의 모든 노력은 결국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그게 당연한 거 아니야?” 하고 생각할 것이다. ‘성실한 학생’이라는 건 곧 ‘성적이 좋은 학생’을 의미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생각 자체가, 학습과 성적을 동일시하는 문화가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학습과 성적을 동일시하는 게 정말 문제일까? 그렇다, 문제다. 그리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수십 년이 지난 후, Y Combinator를 운영하면서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게 됐다.
학생 시절에도 나는 시험공부와 진짜 학습이 다르다는 걸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최소한 시험 전날 벼락치기로 머리에 욱여넣은 지식은 오래 남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보다 훨씬 심각했다. 핵심은, 시험이라는 것이 실제 학습 수준을 제대로 측정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만약 시험이 정말 학습 수준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면, 성적과 학습은 결국 같은 방향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 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시험이 너무 쉽게 ‘공략’할 수 있다. 좋은 성적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몸으로 알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다 보니, 오히려 문제라고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도리어, 그런 게임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순진해 보일 정도다.
가령, 중세사를 배우는 수업을 듣고 있다고 하자. 기말시험이 다가온다. 기말시험은 당연히 중세사에 대한 지식을 평가하는 시험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시험 전 며칠 동안, 중세사에 관한 최고의 책들을 읽는 게 가장 좋은 준비 방법일까? 그래야 시험을 잘 볼 수 있을까?
경험 많은 학생이라면 속으로 이렇게 외칠 것이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좋은 책을 읽는다고 해도, 시험에 나올 내용은 대부분 그 책들에 없다. 필요한 건 훌륭한 책이 아니라,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과 지정 교재다. 심지어 그 안에서도 시험 문제로 나올 가능성이 있는 부분만 신경 쓰면 된다. 시험에 나올 가능성이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나 깊은 논의는 그냥 넘어가도 된다. 중요한 건, 시험에 나올 만한, 딱 떨어지는 정보 덩어리다. 예를 들어, 교수가 “1378년 대분열의 세 가지 주요 원인”이나 “흑사병의 세 가지 주요 결과”를 언급했다면, 그건 꼭 외워야 한다. 그게 정말 원인이나 결과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수업에서는 그렇게 배워야 한다.
대학에는 종종 예전 시험 문제들이 떠돌아다닌다. 이 덕분에 학생들은 배워야 할 범위를 더욱 좁힐 수 있다. 교수님이 어떤 스타일의 문제를 내는지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 기출문제까지 얻는 경우도 흔하다. 많은 교수들은 시험 문제를 재활용한다. 같은 수업을 10년 넘게 가르치다 보면, 의도하지 않더라도 문제를 반복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떤 수업에서는 교수님이 개인적인 정치적 신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경우, 학생들도 그에 맞춰야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이런 요구는 수학, 자연과학, 공학 같은 분야에서는 드물다. 하지만 반대쪽 끝에 있는 과목들, 이를테면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일부 수업에서는, 교수의 관점을 따라가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받기 어렵다.
어떤 주제에 대해 ‘많이 배우는 것’과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이렇게 다르면, 학생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을 탓할 순 없다. 세상이 학생들을 평가할 때 성적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대학원 입시, 취업, 장학금 심사, 심지어 부모님까지 모두 성적을 본다.
나 역시 배우는 걸 좋아했다. 대학 시절 작성한 리포트나 개발한 프로그램 중에는 정말 즐거웠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과제 제출 후, 순수하게 재미로 리포트를 한 편 더 써본 적은? 당연히 없다. 다른 수업 과제가 밀려 있었으니까. 학습과 성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이 오면, 나는 항상 성적을 선택했다.
좋은 성적을 바라는 이상, 누구든 성적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성적을 중시한 다른 이들에게 뒤처지고 만다. 좋은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거의 모두, 이런 선택을 거쳐온 사람들이다. 그 결과, 학생들은 성적과 학습 사이에서 가능한 한 성적을 우선하는 쪽으로 경쟁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험은 왜 이렇게 엉망일까? 정확히 말하면, 왜 이렇게 쉽게 ‘공략’할 수 있을까? 경험 많은 프로그래머라면 바로 답할 수 있다. 보안에 신경 쓰지 않은 소프트웨어를 떠올려보라. 체로 물을 뜨려는 것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시험도 다르지 않다. 위에서 내려온 시험은 기본적으로 ‘공략하기 쉬운’ 상태로 주어진다. 학생들이 치르는 시험이 늘 문제투성이인 이유, 그리고 본래 의도한 학습 수준을 제대로 측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다. 시험을 만든 사람들이 ‘공략을 막는 일’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사들을 탓할 수는 없다. 교사의 본업은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지, 해킹 불가능한 시험을 만드는 게 아니다. 진짜 문제는 ‘성적’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적이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성적이 단순히 ‘이건 잘했고, 저건 개선해야 해’라고 조언해주는 역할만 했다면 학생들은 굳이 시험을 공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느 나이를 지나면 학습이 곧 평가가 된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배울 때마다, 동시에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학 시험을 예로 들었지만, 사실 대학 시험은 오히려 가장 나은 편에 속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생 동안 치르는 시험들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예가 바로 ‘대학 입시’다.
만약 대학 입시가 단순히 지원자의 지적 수준만을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절차였다면, 과학자들이 물체의 질량을 재는 것처럼 공정하고 명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10대들에게 그저 “열심히 공부해”라고만 조언하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해야 하는 그 복잡하고 인위적인 활동들을 보면, 대학 입시가 얼마나 공략 가능한 시험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무의미한 암기 위주의 수업, 별 관심도 없는 동아리 활동, 억지로 준비하는 표준화 시험, 그리고 어디에 맞춰야 할지도 모를 ‘정답’을 찾아야 하는 입시 에세이까지. 이 모든 것은 대학 입시가 얼마나 허술하게 공략 가능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시험은 학생들에게 끼치는 해로움뿐만 아니라, 시험 자체로서도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공략이 너무 쉬워서, 아예 ‘입시 대비’를 전문으로 하는 거대한 산업까지 생겨난 것이다. 입시 컨설팅 업체나 사설 학원은 물론이고, 사립학교들조차 이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대학 입시는 이렇게 허술하게 공략 가능할까?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을 평가하려는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세간에는 ‘똑똑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지만, 사실 명문대 입학 사정관들은 그렇게 말하지도, 그렇게 행동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이 찾는 건 무엇일까? 단순히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이 ‘존경할 만함’은 어떻게 평가할까?
입학 사정관들의 ‘느낌’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마음에 드는 지원자를 뽑는다.
결국 대학 입시는 무엇을 평가하는 시험일까? 바로 어떤 사람들의 취향에 얼마나 잘 맞느냐를 보는 시험이다. 이런 시험이 공략당하기 쉬운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리고 이 시험은 한편으로는 매우 공략이 쉬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생이 걸려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어떤 것보다도 열심히 공략하려 든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삶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고등학생들이 종종 소외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그들의 삶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인위적으로 설계된 궤도 위를 달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교육 시스템이 저지르는 최악의 죄는 시간을 낭비시키는 게 아니다. 진짜 문제는, “형편없는 시험을 공략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을 몸에 익히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훨씬 미묘해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 패턴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Y Combinator에서 스타트업 창업자들, 특히 젊은 창업자들을 멘토링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들이 왜 항상 일들을 그렇게 복잡하게 만드는지 의아했다.
“어떻게 하면 투자를 받을 수 있나요?”
“벤처 투자자들이 우리에게 투자하고 싶게 만드는 비결은 뭔가요?”
그들은 늘 이렇게 물었다.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VC(벤처캐피탈)로부터 투자를 받고 싶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진짜 좋은 투자처가 되는 거예요. 만약 형편없는 스타트업을 가지고 투자자들을 속일 수 있다고 해도, 결국 여러분 자신을 속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똑같이 그 회사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으니까요. 그 회사가 좋은 투자처가 아니라면, 왜 스스로 여기에 시간을 쓰는 거죠?”
그들은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그러면 좋은 스타트업은 뭔가요?”
그래서 나는 설명했다. 스타트업이 ‘좋아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로 좋은’ 스타트업이 되는 방법은 성장하는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매출이 늘어나야 하고, 그게 안 되면 사용자 수라도 늘어나야 한다. 즉, 많은 사용자들을 확보해야 한다.
“그럼 사용자를 어떻게 모아요?”
그들은 온갖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대대적인 런칭 이벤트를 열어 ‘노출’을 확보해야 해요.”
“유명한 사람이 우리 제품을 소개해주면 좋아요.”
“화요일에 출시해야 해요. 화요일이 제일 주목을 많이 받거든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사용자를 모으는 방법은 단 하나예요. 정말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 사람들이 제품을 정말 좋아하게 만들면, 자발적으로 친구들에게 추천할 거고, 입소문이 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나는 창업자들에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좋은 회사를 만들려면,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마치 초기 상대성 이론을 처음 들었을 때의 과학자들처럼 놀랍고도 어리둥절한 것이었다.
“정말 신기하고 대단해 보이지만, 뭔가 이상하고 비현실적인데…”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물었다.
“그럼 ○○라는 유명 인사를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저희는 꼭 화요일에 출시하고 싶어요.”
이 단순한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창업자들은 몇 년이 걸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그들이 게으르거나 멍청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눈앞에 있는 진실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체 왜 이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걸까?”
그러다 어느 날, 이게 수사적 질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왜 창업자들은 쉬운 답이 눈앞에 있는데도, 쓸데없이 복잡한 길을 선택할까? 그건 그들이 그렇게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교육 시스템은 그들에게 “시험을 공략해서 이기는 법”을 가르쳤다. 심지어 ‘이게 시험이다’라는 말조차 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가르쳤다.
특히 최근 졸업한 젊은 창업자들은, ‘진짜 시험’이라는 걸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세상이 원래 그렇게 작동하는 줄 알았다.
어떤 과제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시험을 공략하는 비법’을 찾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YC(와이콤비네이터) 마지막 단계에서 자금을 모으는 걸 ‘시험’처럼 받아들였다. 숫자가 주어지고, 높은 숫자가 더 좋아 보이니까, 그게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시험을 공략해서 이기는” 방식이 통하는 분야가 꽤 많다. 이건 학교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념 때문이든 무지 때문이든, 스타트업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스타트업이 특별한 점 중 하나는, 진짜 좋은 결과를 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물론 모든 일에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스타트업은 사용자 수를 늘려야 이긴다. 그리고 사용자들이 신경 쓰는 건 단 하나, “이 제품이 내가 원하는 걸 해주는가”다.
나는 왜 창업자들이 스타트업을 쓸데없이 복잡하게 만드는지 이해하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그건 학교가 우리 모두를 “형편없는 시험을 공략하는 법”으로 훈련시켰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창업자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조차 그랬다! 나도 그렇게 길들여졌다는 걸 수십 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사실 나는 무의식적으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대기업에서 일하는 걸 피했다. 왜 피했냐고 물었으면 나는 “대기업은 가짜 같아서요”, “관료적이잖아요”, “그냥 싫어요”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대기업이 싫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안에서는 ‘나쁜 시험을 공략해야만 이기는’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비슷하게, 스타트업에 끌렸던 것도 결국 그곳에는 공략할 시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일종의 시행착오 끝에 이 진실에 다다른 셈이었다. ‘나쁜 시험을 공략하는 훈련’을 서서히 지워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이 문제의 이름을 알고, “사라져라!” 하고 선언하면 바로 벗어날 수 있을까? 한번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하다. 이 현상에 대해 명확하게 이야기하기만 해도 상황은 훨씬 나아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힘은, 우리가 그걸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일단 이 문제를 인식하고 나면, 마치 방 안에 거대한 코끼리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 코끼리는 워낙 교묘하게 숨어 있어서 쉽게 보이지 않는다. 이 현상은 아주 오래되었고, 너무나 널리 퍼져 있다. 그리고 이는 악의나 음모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방치’의 결과다. 아무도 의도적으로 이렇게 만들려고 한 건 아니다.
학습과 성적, 경쟁, 그리고 “시험은 해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순진한 가정을 섞어 놓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결과가 나온다. 내게는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고등학교가 왜 그렇게 가짜처럼 느껴졌는지, 그리고 스타트업 창업자들에게 당연한 이야기를 왜 그렇게 이해시키기 어려웠는지가, 둘 다 같은 뿌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이렇게 큰 퍼즐 조각이 한꺼번에 맞춰지는 경험은 정말 드물다.
이런 깨달음은 대개 여러 분야에 걸쳐 새로운 통찰을 가져온다. 이번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예를 들면, 교육 시스템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주기도 하고, 대기업들이 왜 “스타트업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 문제의 ‘개인적인 의미’에 집중하고 싶다.
우선, 이 깨달음은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대학을 졸업하는 야심 찬 젊은이들은 대개, ‘배워야 할 것’만큼이나 ‘버려야 할 것’도 함께 가지고 나온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바꿔놓는다.
예전에는 ‘일’이라는 것을 단순히 “흥미롭다”거나 “별로 흥미롭지 않다” 정도로만 느꼈다면, 이제는 훨씬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이 일은, 나쁜 시험을 공략해서 이겨야 하는 일인가?”
만약 나쁜 시험을 빠르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그런 패턴이 과연 있을까? 다행히도, 그런 패턴은 존재한다.
시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권위자가 부과하는 시험’, 다른 하나는 ‘자연스럽게 생기는 시험’이다.
권위자가 부과하지 않은 시험, 예를 들면 축구 경기 같은 것은 공략할 수 없다. 그냥 “누가 이겼나”를 보는 것이니까. 어떤 팀이 더 뛰어난지는 따로 논할 수 있다. 하지만 승패 자체는 명확하다.
반면, 권위자가 부과하는 시험은 대부분 ‘무언가를 대리로 측정’하려 한다. 예를들어 수업 시험은 단순히 ‘그 시험을 잘 봤는가’를 넘어서 ‘수업을 얼마나 잘 이해했는가’를 측정하려고 한다. 이런 시험들은 공략할 틈이 생긴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틈을 막는 데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요약하면, 나쁜 시험이란 대체로 ‘권위자가 부과한 시험’과 일치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나쁜 시험을 공략해서 이기는 걸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세상이 원래 그런 줄 알고, 별다른 대안 없이 그 길을 따르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히피처럼 사회에서 벗어나야 하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나쁜 시험을 공략하는 분야에서 일해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물론, 한때는 사실이었다. 20세기 중반, 경제가 소수 대기업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던 시절에는,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들이 짜놓은 게임을 따라야만 했다. 당시에 부자가 되고 싶다면, 시스템 속에서 주어진 규칙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좋은 일을 제대로 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부를 향해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변화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는, 선택지가 분명히 나뉘어 있었다. 멋진 것을 만들면서 살고 싶으면 엔지니어가 되어야 했다. 반면, 정말 많은 돈을 벌고 싶으면 임원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둘을 동시에 이루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멋진 것을 만들면서 동시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나쁜 시험을 공략하는 기술은 점점 덜 중요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일’과 ‘권위’ 사이의 연결고리가 점점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결고리의 약화는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변화를 거의 모든 직업 세계에서 목격하고 있다.
스타트업은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사례지만, 글쓰기에서도 똑같은 흐름이 나타난다. 과거에는 작가가 책을 독자에게 전달하려면 반드시 출판사나 편집자 같은 중개자를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직접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바로 인터넷과 디지털 플랫폼 덕분이다.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낙관적이 된다. 이건 우리가 무언가에 발목이 잡혀 있었던 걸 전혀 인식하지 못하다가, 그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전형적인 사례다. 나는 앞으로, 이 낡고 부조리한 구조물이 점차 무너지는 걸 보게 될 거라고 믿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것이다. “나는 정말 나쁜 시험을 공략해서 이기고 싶은가?” 그리고 많은 이들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쁜 시험을 공략해야 이기는 분야’는 점점 인재를 잃게 될 것이다.
반대로, ‘좋은 일을 제대로 해서 이기는 분야’에는 가장 야심 찬 인재들이 몰려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쁜 시험’을 공략하는 일이 중요성을 잃어가면서, 교육 역시 변할 것이다. 더 이상 우리를 그런 식으로 훈련시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 상상만 해도 놀라운 변화가 펼쳐질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이 버려야 할 교훈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함께 버려야 할 교훈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문제를 극복해낼 때, 우리는 그동안 억눌려 있던 엄청난 에너지가 해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글이네요!